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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

태풍(힌남노)올 때 제주도 여행가면 벌어지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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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제주도와는 인연이 좀 없는 것 같다. 10년이 넘는 연애기간 동안 한 번쯤 가볼 법도 한데 둘 다 딱히 가자고 하지도 않았었다. 큰맘 먹고 계획한 2년 전에는 갑자기 코로나가 창궐했고 도지사가 제발 제주도 오지 말라고 기자회견에서 호소했다. 위험을 무릅쓰고 가고 싶지 않았고 우린 말을 잘 듣는 스타일이어서 냉큼 예약한 숙소들을 취소했었다.

제주도 여행 자제를 권고하는 뉴스 화면
원희룡 제주도지사 "제주도 오지마."

2년 만에 다시 제주도 여행이 물망에 올랐다. 오션뷰 숙소를 예약하고 렌트를 할지 스쿠터를 빌릴지 돌고래를 볼지 잠수함을 탈지 이런저런 일정들을 상의했다. 스쿠터를 타고 제주도 해안가를 달릴 생각을 하니 신이 났다. 비행기 표도 끊었다. 이제 출발할 일만 남았다. 

출발 이틀 전부터 태풍 소식이 들렸다. 힌남노. 이제껏 경험하지 못한 역대급 피해가 있을 거라 했다. 태풍을 뚫고 강행해야 할지 이대로 또 취소해야 할지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미 예약한 호텔은 어떡하지? 소비자분쟁해결기준에 따르면 천재지변 등의 사유로 숙박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어 취소하는 경우 계약금을 환급받을 수 있다. 다만 기상청이 강풍 · 풍랑 · 호우 · 대설 · 폭풍해일 · 지진해일 · 태풍 · 화산주의보 또는 경보(지진포함)를 발령한 경우로 한정된다. 또한 여행사나 대행사를 끼고 결제한 경우 수수료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반드시 해당 숙소에 직접 문의해보아야 한다.

우리가 예약한 숙소에 문의했더니 비행기가 결항되면 무료 취소해준다고 했다. 이 경우 결항확인서가 필요하다고 했다. 결항되지 않았는데 그냥 취소할 경우 수수료가 상당했다.

출발 당일. 아직 결항이 안됐다. 항공사 사이트를 쉴 새 없이 새로고침 했지만 운행이 유동적이라는 공지 외에는 이렇다 할 변동사항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날씨는 시시각각 달라지기 때문에 비행기를 띄울 수 있는지 없는지 미리 알 수가 없다. 결항이 안 됐으니 비행기나 숙소도 아무것도 취소를 못했다.

어쩔 수 없이 공항 가서 대기를 했다. 공항 가는 길에도 추적추적 계속 비가 내렸고 하늘이 우중충했다. 결항될 가능성이 크니 공항에서 밥 먹고 숙소 취소를 하고 돌아올 작정이었다.
탑승 15분 전. 비행기 탑승하라는디?

제주행 비행기에 탑승한 모습
타라고 해서 일단 탔다.

비행기를 타긴 탔는데 무슨 교신 중이라서 출발이 지연된다는 방송이 여러 번 나왔다. 아 이러고 다 내리라고 하나보다 했다. 근데 근데 슬금슬금 비행기가 날아오름. 출발함.
비가 와서 비행기가 안뜰줄 알았는데 비가 조금 내려도 비행기가 뜬다는 걸 이번에 알았다. 이따 이야기하겠지만 비행기 결항과 직결되는 것은 비가 아니라 바람이었다. 바람이 세게 불면 비행기가 이륙하고 착륙하는 게 힘들어서 결항될 수도 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깜깜한 하늘 속으로 날아오르는 비행기 안에 있으니 무슨 영화 속 한 장면 같았다. 영화에서 보면 이러고 전혀 다른 차원의 세계로 이동한다든지 타임워프를 하던데.

제주 공항에 도착한 모습
얼떨결에 제주도에 도착했다.

아쉽게도 타임워프는 하지 않았다. 비행기 어느 정도 높이 뜨니 비도 안 왔다. 제주도행 저녁 비행기는 무사히 우리를 제주도 공항에 내려주었다. 강제로 제주도 실려왔다. 거의 힌남노를 마중 나간 수준이었다.


호텔 리젠트 마린 제주 객실 모습
호텔 리젠트 마린 제주

곧바로 숙소로 직행했다. 원래 계획도 첫날은 제주도로 이동해서 저녁 도착이었기 때문에 저녁식사 일정이 다였다. 리젠트 마린 호텔을 예약했는데 제주도 공항에서 택시로 15분 정도 걸린다. 택시에서 내리니 바다냄새도 나고 바다가 보였다. 이 정도로 바다랑 가까운 호텔인 줄 몰랐는데 위치가 정말 바다 코앞이다. 깨끗하고 좋은데 치약 칫솔이 없는 숙소였다.

제주도 동문시장을 구경 갈 예정이었으나 흩뿌리는 비가 내렸다 말았다 했고 시장이 문을 열 것 같은 분위기가 아니었다. 아쉬운 대로 멀찍이 떨어져서 바다를 잠깐 구경했다. 칠흑같이 깜깜한 바다는 속내를 알 수 없이 너울거렸다.

족발과 비빔막국수
제주도 여행 첫끼는 족발과 비빔막국수

잠깐 비가 안 오는 틈을 타 배달음식을 시켰다. 그나마 문을 연 가게들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2인 족발과 수제과일 비빔막국수를 주문하고 보쌈을 추가했다. 뉴스에서는 연신 태풍 힌남노가 북상 중이니 조심하라는 속보가 쏟아졌다. 맥주 한 캔 하면서 뉴스 보다가 잠들었다. 


다음날 아침이 밝았다. 가려고 했던 해안가에 있는 카페는 문을 안 열었다.
작전 변경할 겸 일단 맥도날드로 향했다. 숙소에서 나와 맥도날드까지 가는 길도 순탄치 않았다. 비가 많이 내려서 길가엔 크고 작은 물웅덩이가 있었고 우산이 두어 번 뒤집어졌다. 비가 가로로 내리쳐서 옷과 가방이 다 젖었다.

맥도날드 더블불고기 버거와 치즈버거 셋트
제주도에서 먹는 맥도날드. 늘 먹던 그 맛이다.

이 사진을 찍고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우리 집 앞 맥도날드인 줄 알았기 때문이다. 제주도 여행 간 것을 감쪽같이 숨기고 싶을 경우에는 맥도날드를 추천한다.

풍경이고 나발이고 우리의 목표는 어떻게 다음 숙소로 무사히 도착하느냐가 되었다. 비바람이 세게 불어서 뭘 해도 좀 위험했다. 원래 일정은 스쿠터를 타고 제주 해안을 쭉 따라 내려오면서 맛집과 카페를 들렀다가 제주도 서귀포시에 있는 호텔에서 숙박하려고 했었다. 그래서 일부러 공항과는 멀리 떨어진 곳으로 예약했는데 숙소까지 가는 것도 이렇게 고될 줄이야.
제주 북단 끝에서 남단 끝으로 이동해야 했는데 버스는 적어도 두 번 넘게 갈아타야 했고 택시는 4만 원 이상이 나오는 거리였다. 결국 쏘카로 거북이처럼 서행해서 이동하기로 했다. 낭만적인 제주도 스쿠터 여행이 순식간에 태풍 피하기 챌린지가 되는 순간이었다.

아찔했던 도로 상황 (시야확보가 쉽지 않았다.)

하늘은 우중충하고 길에는 차들이 많지 않았다. 도로에 부러진 나뭇가지가 많이 떨어져 있었고 간간이 비가 퍼부을 땐 앞이 하나도 안보였다. 우여곡절 끝에 숙소에 도착하였다. 피난처에 당도했다는 안도감이 몰려왔다.

호텔 더본 제주 로비
호텔 더본 제주 로비

이번 여행의 유일한 관광지 백종원 호텔이다. 로비는 사뭇 분주했다. 언뜻 들으니 태풍을 피해서 오신 제주도민 분들도 계신 것 같았다. 체크인할 때 태풍 때문에 정전이 있을 수 있다고 안내받았다. 정전되면 비상전력으로 최대한 정상 가동될 것이라 했다.

호텔 더본 제주로 하길 잘한 게 여기 웬만한 건 다 있어서 밖으로 나갈 필요가 없었다. 빽다방과 베이커리, 중식당, 고깃집, 회센터 등이 있어서 종목별로 다양하게 식사가 가능하고 편의점도 있다. 건물 안에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복합단지 형태였다. 예약하기가 어려웠는데 미리 예약하길 잘했다 싶었다.

그래도 하루종일 숙소 안에만 있긴 아쉬워서 숙소 가까운 곳만 한 바퀴 둘러보기로 했다. 비가 사그라들기를 기다렸다가 소강상태를 틈타서 살짝 나가보았다.

차 안에서 찍은 돌하르방
정말 갈 곳이 없어서 배회하다 찍은 돌하르방

천지연 폭포로 가볼까

- 바닥과 돌이 미끄러울 것 같아 기각

해안도로를 가볼까

- 파도 갑자기 세지면 위험해서 기각

올레길? 오름?

- 산책하다 날아갈까 봐 기각

먹구름 낀 하늘과 파도치는 바다를 바라보는 모습
폭풍전야. 태풍은 오늘 밤에 제주를 지나갈 것이다.

저긴 어딘지도 모르겠다. 파도가 세서 바다를 피하려고 했는데 어디로 가도 바다가 나오는 바람에 숙소로 되돌아가려고 잠깐 세운 주차장이다.

여행 와서 아무 데도 못 가는 이 상황이 기가 막히기도 하고 신선한 경험에 재미있기도 하고 무섭기도 했다. 화창한 날씨의 멋진 풍경을 본다던가 근사한 맛집을 들르진 않았지만 이것 나름대로 나쁘지 않았다. 어차피 인생은 예상 밖의 일들로 가득 차 있고 비바람 부는 제주는 여전히 아름다웠고 우리는 불안의 시간들을 공유했다.

제주도 바다에서 셀카를 찍는 모습
거대하게 휘몰아치는 자연과 그 와중에 셀카를 찍어야겠는 한낱 인간

 

숙소로 돌아오니 내일 비행기가 결항되었다는 연락이 왔다. 올 게 왔구나. 제주에서 출발하여 김포로 가는 비행기가 태풍 힌남노의 영향으로 결항되었다. 우리 비행기뿐만 아니라 제주도에서 출발하는 다른 비행기들도 다 결항이었다.

비행기 결항 기준을 검색해 보니 "태풍으로 인해여 강풍 및 호우 등의 경보기준에 도달할 것으로 예상될 때" 또는 "10분간 평균풍속이 25KT 이상 또는 최대순간풍속이 35KT 이상인 현상이 발생 또는 예상될 때" 결항된다고 한다. 초속으로 환산하면 평균풍속 13m/s 이상 또는 최대순간풍속 18m/s 정도 된다. 태풍 힌남노의 풍속은 40~60m/s로 결항 기준을 훨씬 넘고도 남았다.

이대로 제주도에 발이 묶이는 건가 싶어 걱정이 됐지만 침착하게 항공권을 변경하였다. 무사히 집에 돌아갈 수 있을까? 일단 다시 예매를 했지만 기상상황에 따라 또 결항될 수도 있을 것 같아 공항에서 대기하기로 하고 잠들었다.

제주항공 항공기 결항 안내장
제주항공 항공기 결항 안내

태풍이 지나가고 있구나 실감 났던 게 자는 동안 여러 번 정전이 됐다. 여행 와서 호텔에서 이렇게 정전이 많이 되는 것도 처음이다. 객실 전원이 뚝 끊기면서 나갔다가 다시 켜졌다가가 반복됐다. 숙소가 한산했으면 약간 무서웠을 수도 있었을 것 같은데 이 날씨에도 불구하고 호텔 더본에 투숙객들이 많았기 때문에 의외로 안심이 되었다. 

다음날 아침에 호텔 더본 조식을 먹으러 갔다. 밤새 정전되어서 상황이 여의치 않았을 텐데도 불구하고 따뜻한 음식들이 완벽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호텔의 시설 보다도 위기대처능력이 더 놀라웠다.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정성껏 준비된 음식들.

호텔 더본 조식 뷔페
간단하게 배를 채우고 공항으로 향했다.
화창한 날씨의 제주 공항 모습
화창한 날씨의 제주 공항

날이 갰다. 거짓말처럼 날씨가 맑았다. 제주공항에 도착하니 이제 완전히 태풍 영향권에서 벗어난 것 같았다. 비구름 배경만 보다가 파란 가을 하늘을 맞닥뜨리니 사뭇 오랜만이었다.

그 어느 때보다 예측불가했던 여행이었다. 딴 세상에 있다가 온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이렇게 제주여행이 마무리되었다.

비행기 안에서 바깥 하늘을 찍은 모습
제주 여행을 마치고 돌아가는 비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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